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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촬영을 마치고

by 김핸디 2009. 8. 30.


 그러니까, 이건 여러모로 비현실적인 경험이었다. 빨갛게 칠한 손톱과 입술. 그리고, 난생 처음 신어본 하이힐. 대한민국의 과년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화장이나 힐같은거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동안의 나와는 단절된것같은 느낌.

 내 발은 언제나 스니커즈같은것들이 신겨져있었고, 타고난 신체조건으로 인해 힐 같은건 필요하지도, 신어보고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실제로 거들떠도 안보고 살아왔고, 그런데 그런 내가 이번 촬영에 수시간동안 힐을 신고 달리고 그랬다는게-

 믿겨지지 않는 그런 경험, 말이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촬영은, 새벽 5시가 되어서 끝나고, 그래서 소위 말하는 '날밤까기' 를 제대로 겪고-

 뭐, 이전에도 '날밤까기' 의 경험이 전무한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중간에 정말 한 두시간도 자지않고 각성된 채로 있었던건, 수면부족이 최대의 약점이라고 울부짖는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기네스에 올릴만한 경험, 인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반주검이 되어 1시간을 자고, 정말로 '딱 한시간만 자고' 다시 일어나 교회에 가야했던 초인적인 경험, 그래서 예배시간에 실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내 기억으로는 중학생때 이후 처음, 설교시간에 고개로 디딜방아를 찧고, 불현듯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말씀이 한참이나 지나가 있던 그런 경험.

 예배가 끝나면 시체처럼 자 주리라, 고 다짐아닌 다짐을 했건만, 그 무거운 몸둥아리를 끌고 도서관에서 가서 5권의 책을 빌리고, 집에와서 내일 떠날 여행의 짐을 싸고, 이렇게 9시가 넘는 시간까지 컴퓨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젯밤이 1년전, 혹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간처럼, 과거와 미래로 동시에 느껴지는 희한한 경험.

 어제의 김감독은 '친구' 처럼 보이지 않았건만, 그러니까 정말로 '감독님' 처럼 보였지만, 새벽에 촬영을 마치고는, 다시 그 '친구' 로 돌아와있던 익숙한 반가움을 느꼈던 경험. 조감독님의 난생 처음으로 듣는 희귀한 웃음소리를 들었던 경험. 사운드를 담당하시던 분의 드라마속 주인공같은 라이프스토리를 얼핏 들었던 경험. 말로만 듣던 09 학번을 내 눈앞에서, 직접, 보고 대화했던 믿기지 않는 경험.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09학번이라는건 존재하는거구나' 라는것을 깨닫게 해 준 -

 생애 가장 맛있게 기억 될 백반집에서 두 끼나 먹었던 경험과, 밤 10시와 새벽 5시에 비교하며 볼 수 있었던 잊지 못할 남산의 야경,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십개의 시선을 홀로 받아야만 했던 내 생애 가장 쪽팔렸던, 그래도 재밌었던 경험.

 수 많은 첫 경험들을 남기고 사라진 '촬영의 추억'.. 이러한 경험을 선사해 준 김감독에게 감사를-

 그러니까, 결국 이건 조금 지리하고 나름 박민규를 따라해 본 Thanks to.. 조금은, 이를 수도 있는, 그런 Thanks to. 뭐, 그런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