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아주 괜찮은 연극을 한 편 보고왔다. <라이어>만큼 웃겼고, <줄리에게 박수를> 만큼 찡했다만 과찬일까.
예전만큼 나도 연극을 자주 보지는 않지만, 가끔씩 이런 연극을 볼때면 우리나라 연극계를 이토록 지원하지 않는 정부와 영화에만 너무 길들여져버린 관객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가 오가는 신나는 사투리의 향연과 배꼽잡는 캐릭터,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신랄한 현실풍자에 단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싶은 연극이었다.
거울이 돋보이는 무대세트, 삼도봉 미국쌀 창고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네 명의 사람들이 지목된다.
1. 제일 큰 성님, 갈필용 _ " 다 싸질러 버릴거여.."
쌀창고에 가장 먼저 와 있었던, 그래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 갈필용 성님.
게다가 시종일관 " 싸질러 버린다 " 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내 뱉어내고,
" 내가 다 엎어쓸테니께 " 라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농민운동의 대부. 이 성님, 범인일까?
2. 정계입문 후문으로 한 동네이장, 노상술 _ " 아, 제 이름이 노상술이잖유..그러니까..노상..술"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정계입문..을 하려했으나 쪼까 일이 꼬여서 그냥 동네이장으로 눌러앉게 된 노상술.
허구헌날 술을 입에 달고사니 제 정신이 아닐터, 횡설수설 하는 말들과 끝도없는 천연덕스러움이 뭔가 수상하다.
"살다보면 누구나 원수가 될만한 년놈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거 아니겠슈" 라고 내뱉는 점도 의심간다. 이 술꾼, 범인일까?
3. 장가 못 가 사무친게 많은 농촌 총각, 배일천_ " 그 여자.. 마 꽃뱀아입니꺼 "
결혼도 못하고 엄니와 단둘이 사는 농촌총각. 잘 되는가 싶더니만.. 마 세상이 하수상해가 사기당해버린 이 남자.
사기꾼에 대한 원한과 결혼 못 한 노총각의 한이 결합되 범죄를 저지른거 아닌지.. 이 총각, 범인일까?
4. 대가리를 못 만나 서글픈 남자, 김창출 _ " 제가요.. 대가리만 만나면 되는거거덩요? "
윗대가리들의 횡포에 못이겨 '대가리' 찾아 나섰건만.. 여길 가면 저길 가보라하고 저길 가면 또 거길 가보라해서 빡돌아버린 남자. " 대가리 어딨어? 대가리 내놔 " 라며 거친 말을 내뱉고, 손에는 화염병을 든 이 열혈 강원도 농민. 이 남자, 범인일까?
해학속에 숨겨진 가슴 따끔한 풍자.
네 명의 용의자를 통해 사건의 정황을 들으며 이 연극은 진행된다. 각각의 캐릭터가 전하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밌다. 그러나, 그렇게 웃어제끼는 사이 농민들이 처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늘어만 가는 농협 빚, 쌀 수입 개방에 맞서싸우는 투쟁, 농촌총각의 결혼 문제, 태풍피해에 대한 윗대가리들의 미봉책 등. 내가 이 연극에 정말 찬사를 늘어놓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코미디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처한 현실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는거였다.
농촌은 '향유' 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 이다.
대부분의 미디어속의 농촌의 이미지는 '향유' 에 대상에 다름아니다. 소박하고 따스한 전원 풍경, 정감있는 사투리의 사람들. 그리고 그 투박하고도 순진한 모습으로 TV 밖 현대인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일련의 모습들. 미디어는 농촌을 철저하게 대상화하여 그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만을 뽑아낸다. 하지만 대체 어느 농촌이 그렇게 웃음과 정이 만발하는 그저 평화의 공간이란 말인가. 농민들은 끊임없이 목줄을 죄어오는 현실속에서 투쟁하고 궐기하고 항의한다. 내가 최초로 만난 '실제 농민' 의 모습도, 여섯시내고향 등에서 보여주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농민이 아니라, 허연머리에 주름진 손 마디를 가지고도 비오는날 목이 터져라 FTA에 반대하던 저항의 모습이었다. '다른 산업을 위해서는 농민이 희생할 수밖에 없지 않나'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 무시무시한 사회에서, 매년마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로 분류되는 '태풍피해' 에 신음하는 이 사회에서 무슨 '전원일기' 고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웃으며 봤던 이 연극이 무지하게 슬펐다. 99마리의 양을 가진자들이 기어코 1마리의 양을 가진이의 그 마지막까지 빼앗아버리는 현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 그래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이 아이러니니까. 아, 삼도봉 美스토리. 정말이지 실컷 웃을 수 있는, 그러나 왠지 코끝은 시큰해지는 좋은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