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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드라마쿠스

내 삶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스트레인저 댄 픽션>

by 김핸디 2009. 9. 23.


 어느날 문득 깨닫고 보니, 자신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쥐고 흔들며 개입하고 있다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작가가 정해놓은 이야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이 쇼의 주인공이라는것을 안 순간, 멋지게 무대 뒤로 퇴장해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있었지만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주인공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것을 알고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신은 실제 인물이면서도 가상 인물이기 때문이다. 말이 안되지만, 그런 남자가 있다. 그가 바로 해롤드다.

 지난번 <섬머 타임머신 블루스>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삶은 때때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고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것은 정해져있고, 단지 그 틀안에서 사소한것만이 우리 자신의 온전한 그것이 될 수 있는것이아닐까. 우리의 삶이 이와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우리가 인생의 큼직큼직한 사건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살아가는것은 퍽이나  바보같은 짓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다 하더래도, 인생의 큰 사건들은 내 힘으로 혹은 내 노력으로만 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는 살아가면서 나와는 무관한 요소들이 인생의 영향을 주곤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우리 자신의 인생'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삶에서의 지극히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나온다. 아무리, 꼼꼼한 작가라도 당신 인생의 1분 1초단위를 일일히 참견하며 달려들 수는 없고, 아무리 다른 시공간에서 '결과' 가 현재와 동시에 떠돌고 있더라하더래도, 그 결과로가는 모든 과정과 순간들을 미래가 결정할 수는 없을테니까. 작가가 쥐고 흔드는 소설속의 인생일지라도 삶의 무수한 부분에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추억들이 모여 '나 자신의 온전한 인생' 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남는다. 아주 작고 작은 순간, 그 틈새들 사이로 말이다.

 해롤드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는 죽을것이고,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삶을 사랑했다. 그의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느꼈고, 한 여자를 사랑했고, 동료를 기쁘게 해주길 원했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당신이 작가라면, 그래도 이런 남자를 '원래의 의도대로' 죽음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비록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삶을 살았던 이지만, 그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한 존재를?

 해롤드를 창조한것은 작가 에펠이었지만, 그리고 그를 비극속의 주인공으로 만들기위해 노력했었지만, 결국 해롤드의 인생은 희극이었다. 해롤드 그 자신이 비극적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희극의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인 에펠마저 바꿀 수 없었다. 해롤드는 에펠의 가상인물이었지만, 그는 실제로 살아가고 또 살아갈 실제의 인물이기도 했으므로. 에펠은 더 이상 해롤드 인생의 방향키를 본인이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해롤드의 삶을 해롤드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행은 우성이고 행복은 열성이어서,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불행해지지만, 노력해야만 행복해진다' 라던 어느 소설가의 글귀가 떠올랐다. 우리의 삶은 환경적으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꾸만 비극으로 이끌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영향들속에서 우리 스스로도 마치 비극적 주인공으로 태어난냥 자기 인생을 체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 비극이 될지 희극이될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는 오직 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달렸다. 희극을 살것인가, 비극을 살것인가. 그 선택권은, 아마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최후의 축복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