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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드라마쿠스

시간에 대한 흥미진진한 고찰, <섬머 타임머신 블루스>

by 김핸디 2009. 9. 20.

저기 말이지.. 성(姓) 은 바꿀 수 있는건가?


 자, 여기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디로 가보고 싶은가. 선사시대? 30년후의 미래? 흔히 타임머신을 생각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엄청난 시간여행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발칙한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고작 '어제' 로 돌아가는데 사용한다. 왜? '어제' 콜라를 쏟아서 에어컨 리모컨이 고장났고, 그 덕분에 '오늘' 한 여름에 살인더위를 감내해야하기 때문이다. 어제로 가서, 콜라를 쏟기전의 그 리모컨을 가져올수만 있다면! 지상 최대의 난관 에어컨 고장에 맞서, SF동호회 벌이는 기상천외한 시간여행. 이 영화는 이렇게 타임머신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뒤집어엎는데서 시작된다.

 일본영화 특유의 엉뚱함과 재기발랄함으로 이들의 모험담을 지켜보는것은 시종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우에노 쥬리처럼 우리에게 제법 인기있는 배우가 나오고, 저 사진속의 에이타처럼 무척이나 훈남인 남자주인공까지 나오니, 이 어찌 눈이 즐겁지 아니할까. 그리고 엄청나게 시끄럽고 복작거리는 가운데, 조용하게 싹트는 귀여운 러브스토리라니+_+ 이 영화,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뭐니뭐니해도 시간에 대한 고찰거리를 제공해 준다는데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의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미래가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타임머신' 의 가능성을 믿느냐 혹은 안믿느냐의 문젠데,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야만 일단 시간여행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그렇다치더래도, 미래가 현재와 같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은 그 사실자체로도 엄청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건 멀리서 보면 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사람의 인생도 탄생부터 죽음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개념의 것이 되어버리니까.(이건 뭐, <제 5 도살장> 에 나오는 트라팔마도어인들도 아니고;) 여튼, 그렇다면 내 미래는 이미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는 제법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든,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일테니까.

 그러고보면, 강풀의 <타이밍>에서도 10분뒤를 볼 수 있는 여자가 늘 하는 말은 '나는 미래를 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어요.' 였고, 장진 감독의 <동감> 에서도 미래의 유지태와 현재의 김하늘이 소통하면서, 김하늘의 그 시대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었다. 유지태의 어머니가 김하늘의 친구이므로, 김하늘은 유지태의 아버지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모든것을 결정하는것은 미래이다.

 하지만,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게 낙심하거나 무기력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미래와 다른 시공간이긴 하지만 현재는 미래와 같이 '진행중' 인 상태고, 비록 미래의 '결과' 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할 지언정 '과정' 에는 변화의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 이건 공상과학적인 상상에서 불과한 얘기긴 하지만, 요는, 현재에선 있는 그대로 충실하는게 선택사항중에서는 최선이라는 얘기가 된다. 뭐, 그게 설사 미래를 바꾸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무척이나 대단했다. 감독이 누군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고등학교때 '진짜 재밌는 상상력이다' 라고 생각하며 봤던 <사토라레>의 감독. <사토라레>를 보면서도, '저거 왠지 있을것도 같아'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도 즐거운 상상이 떠나질 않는다.  이 감독, 물건이다. 앞으로 이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볼 것을 다짐해본다. 미쎤, 컴플리또.